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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측천무후의 남성 편력 – 여인천하의 비밀스러운 권력관계

by 민트 롤로 2025.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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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여황제 측천무후 남성편력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성 황제, 측천무후를 아시나요?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정치적인 수완과 개혁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요, 하지만 그녀를 둘러싼 가장 큰 논란 중 하나는 바로 남성 편력(男性遍歷)이죠. 유교적 가치관이 강했던 당시 시대에, 여성의 성(性)과 권력은 철저히 억제되었기에 측천무후의 행보는 더욱 파격적으로 비춰졌습니다. 오늘은 그녀의 남성 관계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평가를 통해, 왜 그녀가 ‘악녀’로 불리게 되었는지 알아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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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시절 – 황제의 후궁에서 황후로

젊은 시절 측천무후
젊은시절 측천무후(출 처 : 유튜브)

 

측천무후는 원래 당 태종 이세민의 후궁이었어요. 이때는 총애를 받지 못하고 조용히 지내야 했지만, 태종 사후 비구니로 출가했다가 그의 아들인 당 고종(이치)의 총애를 받아 재입궁하게 됩니다. 역시 '될 놈은 된다.'는 말이 떠오르네요 이후 황후인 왕황후와 후궁 소숙비를 제거하고 황후 자리에 올라, 여성으로서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도 측천무후는 당 고종과의 관계 외에, 궁중 내 정치적 협상과 감정적 유대를 능수능란하게 활용했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 측천무후의 비밀 연인들

* 장의지(張易之) · 장창종(張昌宗) 형제

측천무후의 말년, 그녀는 자신보다 수십 세 젊은 미남 형제인 장의지와 장창종을 곁에 두고 총애했는데요. 이들은 단순한 내관이나 시중이 아닌, 무후가 직접 정무와 개인적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등용한 인물로 전해집니다. 

  • 그녀는 이들을 '예인(藝人)'으로 궁에 들였지만, 사실상 연인으로 삼았어요.
  • 장의지는 측천무후를 위해 시를 지어 바쳤고, 무후는 그 재능과 외모를 모두 사랑했습니다.
  • 형제는 ‘이화정의 꽃미남들’이라 불리며 궁궐 내 권력을 휘둘렀고, 이에 대해 신하들의 반발도 거세졌습니다.

이들은 아무것도 안하고 측천무후의 비위만 잘 맞추면 되는 기쁨조 같은 존재였죠. 측천무후가 나이가 들자 모든 권력을 이 두 형제에게 위임하기도 했는데, 관료들은 불만이 커지기 시작하고, 이러한 관계는 정치적 혼란과 연결되어 결국 무후가 퇴위하게 되는 한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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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성 편력, 정치적 수단인가?

 

측천무후의 남성 관계는 단순한 사치나 정욕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권력 유지와 정보 수집, 심리적 위안을 위해 젊은 남성을 가까이 두었고, 이들을 정치적 도구로도 활용했습니다.

  • 정무를 함께 상의하거나 심복으로 삼는 경우도 많았고, 장의지 형제처럼 측근 정치에 적극 참여한 사례도 있습니다.
  • 또한, 일부 남성은 궁정 내 정보를 전달하거나 무후의 의중을 대변하는 ‘내밀한 통치의 도구’ 역할도 했습니다.

'야사'에 다르면, 측천무후는 3천 명의 남자들과 밤을 보냈고, 밤을 보내고 나면 자신과 밤을 보낸 사실을 소문날까 봐 남성들을 아무도 모르게 죽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게 사실인지 어떤지 잘은 모르겠지만, 측천무후의 남성편력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이러한 행보는 남성 황제들이 수많은 후궁을 거느린 것과는 달리, 당시 사회가 여성의 성과 권력을 이중 기준으로 판단한 결과 ‘방탕’이라는 비난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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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교 사회 속 ‘악녀’ 프레임

측천무후
측천무후(출 처 : 유트브)

 

 

당시 유교적 질서에서는 여성의 정조와 순종이 미덕으로 강조되었고, 권력은 철저히 남성 중심이었습니다. 그런 시기에 측천무후처럼 적극적으로 남성과 관계를 맺고 권력을 행사한 여성은 곧 ‘악녀’로 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 실제로 후대 역사서는 그녀를 두고 ‘정욕의 화신’, ‘암흑 정치의 주범’으로 기록했습니다.
  • 하지만 이러한 기록이 남성 중심의 사관(史觀)에서 나온 왜곡이라는 해석도 많습니다.

 

@  현대적 재해석 – 욕망과 생존 사이

 

오늘날 측천무후의 남성 편력은 여성의 성적 주체성과 권력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 그녀의 행위는 단순한 정욕이 아닌 자기 의지로 삶과 정치, 감정을 주도한 여성의 모습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 남성 황제들의 수많은 후궁은 미화되고, 여성이 그러한 관계를 맺었을 때만 비난받는 이중성은 현대의 관점에서 비판적 성찰의 대상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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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측천무후의 남성 편력, 금기의 파괴인가, 권력의 도구인가

측천무후의 남성 편력은 단순히 사적인 연애사가 아닌, 권력 구조 안에서 여성이 어떻게 자기 욕망과 권력을 조화시켰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에요. 유교 질서 속에서 파격적인 선택을 한 그녀는 결국 ‘악녀’로 남았지만, 그 이면에는 생존, 정치, 인간적인 고독이 담겨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녀를 다시 평가하며, 여성의 욕망과 권력, 그리고 사회적 편견에 대해 성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 포스팅을 마치며...

측천무후의 남성편력은 정치적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생각이 들기는 해요. 유교사회에서 여성이 최고의 권력자인데, 남성들은 불만이 있어서 쉽게 얘기할 수 없었겠죠. 자칫 잘못하면 언제 죽을지 몰랐죠. 

 

남성왕이 후궁들을 많이 들이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측천무후가 여러 젊은 남성들과 밤을 보냈다고 하여 악녀라고 하는 것은 굳이 따지자면 차별이 되겠죠. 단, 그 남성들을 죽였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어렵게 왕의 자리를 차지하고도 측천무후는 남성편력으로 몰락했네요. 역사에도 남성편력을 가진 최초의 여황제, 권력의 남용과 오용은 언제나 이런 허망한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영원한 권력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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