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에는 많은 공주들이 있었지만, 평양공주처럼 칼을 들고 천하를 바꿔버린 공주는 한 명이었습니다. 평양공주는 당나라를 세운 이연(李渊)의 딸로 역사상 유일하게 군례(軍禮)로 장례를 치른 여성 장군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평양공주의 출생과 사랑, 전쟁의 이야기들에 대해서 알아볼게요.
@ 당 나라의 딸로 태어나다
평양공주는 약 583년경, 후일 당나라 초대 황제가 되는 이연(당 고조)의 셋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두 씨 황후(杜氏)로, 지성과 덕을 겸비한 여성이었다고 전해지는데요, 그녀의 형제는 역사에 유명한 이세민(李世民, 당 태종)과 이건성(李建成)으로, 평양공주는 어린 시절부터 황실의 책임감 속에서 자랐습니다.
수나라 말기, 정치가 혼란하고 민심이 흉흉했던 시대였죠. 이런 환경 속에서 평양공주는 단순한 왕족이 아닌, 결단력 있는 리더로 성장합니다.
@ 채소(柴紹)와의 결혼 — 운명의 동반자
젊은 시절 평양공주는 명문 귀족 출신의 채소(Chai Shao) 와 혼인합니다. 채소는 충직한 무장이자, 공주의 운명적 파트너였습니다.
결혼 초기엔 평화로운 삶이 이어졌지만, 아버지로 인해 평양공주는 전쟁에 참전하게 됩니다.
617년, 부친 이연이 수나라를 상대로 반란(당 건국의 시작)을 일으키자, 남편은 전장으로 나섰고 공주는 홀로 남아 자신의 군대를 조직하기로 결심합니다.
@ “여자군(娘子軍)” — 평양공주의 의병이 일어서다
그녀는 전쟁 중에 가문의 재산을 풀어 백성을 돕고, 의로운 사람들을 모았는데, 산속의 농민군, 의적, 탈주병까지 그녀의 뜻에 따라 모여들었고, 마침내 약 7만 명의 의병 군대가 결성되었습니다. 이 부대는 역사에서 “여자군(娘子軍)”이라 불렸습니다.
평양공주는 약탈을 엄격히 금하고 백성을 보호하며 정의로운 군대를 세웠죠.
💬 《구당서(舊唐書)》에는
“평양공주는 군율이 엄격하고 백성을 괴롭히지 않아 모두가 그녀를 따랐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녀의 군대는 민심의 지지를 얻으며 수나라 정권에 맞서는 핵심 전력이 됩니다.
@ 평양공주, 당 건국의 주역이 되다
618년, 부친 이연이 마침내 수나라를 무너뜨리고 당나라를 세웠는데, 그 영광의 순간 뒤에는 평양공주가 이끈 여자군의 활약이 컸습니다. 평양공주는 여성이라고 단 한 번도 군사적 권한을 부정당하지 않았고, 백성과 전사를 이끄는 지도자의 상징으로 기록되었습니다.
@ 채소와의 동등한 전우같은 부부관계
평양공주와 채소는 동등한 전우같은 부부관계를 유지했는데요, 남편 채소가 전장에 나서면 평양공주는 후방에서 의병의 지휘했고, 둘은 서로를 존중하며 나라를 위해 싸웠습니다. 평양공주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절대 차별받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 두 명이 있었는데, 그중 채령무(柴令武)는 훗날 당 태종의 사위가 되어 가문을 잇게 됩니다.
평양공주와 채소의 사랑은 '전쟁속에서도 지켜낸 연대'로 남아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 젊은이의 죽음과 영예로운 군례(軍禮)
평양공주는 623년경, 불과 30대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말 젊은 나이에 너무도 안타까운데요, 정확한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전쟁 후유 중이나 질병으로 인한 사망으로 추정이 되고 있습니다.
아버지 당 고조 이연은 이 젊은 딸의 죽음을 기리면서 이렇게 명했다고 합니다.
“공주는 군대를 일으켜 나라를 세웠다.
어찌 여자라 하여 군악을 금하겠는가.”
아버지 이연의 명에 따라 평양공주는 중국 역사상 유일하게 군례로 장례를 치른 여성이 되었습니다. 이연이 당나라를 세울 수 있게 된 것은 전장 참여를 자처하고 나선 평양공주의 공이 큽니다. 군대도 모집하여 아주 큰 공을 세웠기에 군례로 장례를 치른 것입니다.
그녀의 무덤에서는 북소리와 군기가 울려 퍼졌고, 그 장면은 ‘영웅의 귀환’ 그 자체였다고 전해집니다.
@ 평양공주가 남긴 유산
평양공주는 “황제의 딸”이라는 타이틀을 넘어 여성 리더십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단순히 칼을 든 공주가 아니라, 혼란한 시대에 정의를 일으킨 대범한 존재였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녀의 이름은 여성 용기와 자존의 상징으로 기억되며, 중국 현지에는 그녀를 기리는 ‘여자관(娘子关)’이라는 지명까지 남아 있습니다.
@ 마무리하며....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면 왕을 비롯한 공주들은 전부 도망가기 바쁜데 평양공주는 왕좌의 그늘이 아니라 스스로 군대를 모아서 전장에 참여한 정말로 대범한 여성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부분의 역사 속 공주들을 보면, 온실 안 화초를 자처하며 궁 안에서 시기와 질투에만 눈이 멀어서 과소비와 향략만을 즐기는 공주들이 많았는데, 이처럼 전장까지 참여하여 헌신한 공주는 처음이라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너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서 아름다운 30대를 꽃피워보지는 못했지만, 역사적으로 길이 남아서 아직까지도 평양공주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조금은 위안이 될 것 같습니다.
“용기란 성별이 아닌 영혼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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