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학자이자 문장가로 꼽히는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년경~기원전 86년경)은 『사기(史記)』라는 방대한 역사서를 집필하여 후세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궁형이라는 형벌을 받았음에도 정신력으로 버텨서 사기를 집필하였는데요, 오늘은 사마천의 일생과 업적, 흥미로운 일화, 그리고 『사기』 열전에 담긴 인물들의 이야기까지 알아볼게요.
목 차
- 사마천의 일생과 성장
- 궁정 생활과 부친의 유언
- 억울한 옥사와 궁형의 치욕
- '사기' 의 집필과 위대한 업적
- 사마천의 대표적인 일화
- 사기 열전의 주요 이야기
- 사마천의 역사관과 평가
- 사마천의 유산
* 사마천의 일생과 성장
사마천은 현재의 산시성(陝西省) 한성(韓城)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은 궁정의 태사령(太史令)으로, 천문과 역법에 정통하며 역사서를 편찬하던 집안의 학문적 전통을 이어가고 있어서, 어린 시절부터 사마천은 고전 문학과 역사서를 읽고, 다양한 지역을 여행하며 풍부한 경험을 쌓았습니다.
또, 사마천은 청년 시절, 중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풍속과 문화를 배우는 여행을 했는데요, 이러한 여행은 훗날 『사기』를 집필할 때 다양한 인물과 사건을 사실적으로 기록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 궁정 생활과 부친의 유언
사마천은 궁정에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이 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죽기 직전에 “나는 사서의 일부만 완성했다. 너는 반드시 이 작업을 완성해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해요. 이 유언은 사마천에게 평생의 과업이 되어서『사기』의 서문에서도 “아버지의 유업을 계승한다”는 사마천의 의지가 드러납니다. 궁형으로 힘든 상황에서도 아버지의 유언을 따르는 사마천의 의지와 인내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억울한 옥사와 궁형의 치욕

사마천의 인생에서 가장 큰 시련은 기원전 99년경 발생했습니다. 무제(武帝) 치세 때, 흉노와의 전쟁에서 장군 이릉(李陵)이 패배했습니다. 당시 사마천은 이릉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했다고 변호했는데, 무제는 이를 반역으로 간주해 사마천을 사형에 처하려 했습니다. 이건 권력의 남용이었죠.
사마천은 사형 대신 궁형(생식기를 거세하는 형벌)을 선택했는데요. 궁형은 신체적 고통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치욕스러운 형벌이어서 궁형에 처해졌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픔보다 치욕스러움에 삶을 더 이상 이어가지 못하고 스스로를 해했어요. 그러나 사마천은 “죽음은 한순간, 글은 영원하다”는 신념으로 굴욕을 감내하고, 세상과의 고립과 외로움을 뒤로한 채, 이 치욕을 딛고 『사기』를 완성하겠다는 결심은 그의 학문적 집념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려던 의지도 대단한 것 같아요.
*『사기』의 집필과 위대한 업적
사마천은 13년간 궁형의 치욕과 정신적 고통을 견디며 『사기』를 집필했습니다. 『사기』는 황제 신화에서부터 한 무제 시대까지 약 3천 년의 역사를 망라한 중국 최초의 기전체(紀傳體) 역사서인데요. 전 130권(본기 12, 표 10, 서 8, 세가 30, 열전 70)으로 구성된 방대한 작품으로, 이후 역사서의 모범이 되어 널리 알려졌습니다.
『사기』의 가장 큰 특징은 권력자뿐 아니라 평민, 유랑 시인, 장사꾼, 반역자 등의 이야기를 다룬 ‘열전(列傳)’입니다. 이는 권력 중심의 역사 기록을 넘어, 인간의 다양한 삶과 가치를 담아내어 중국의 최고의 역사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사마천의 대표적인 일화
사마천의 삶에는 다양한 일화가 전해집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이릉 변호 사건입니다. 사마천은 “충성스런 장군을 변호하지 않으면 정의가 무너진다”라며 이릉을 옹호했습니다. 이를 두고 사마천은 “나는 사실을 기록할 뿐, 권력자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라는 불굴의 신념을 드러냈습니다.
사마천이 이릉의 편에서서 변호를 하자, 괘씸하다고 느낀 한무제가 반역으로 몰아가서 사형과 궁형 중에 선택을 하라고 했어요. 역사서 집필을 위해 사마천은 궁형이라는 형벌을 선택하게 된 것이었죠. 사마천은 궁형 이후에도 좌절하지 않고 “나는 하늘의 뜻을 기록한다”라며 『사기』 집필을 이어갔다는 일화는 그의 굳은 의지를 보여줍니다.
*『사기』 열전의 주요 이야기
사마천의 『사기』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열전입니다.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문학적 서사로 재탄생하여, 역사적 사실과 인간적 고뇌를 동시에 담고 있습니다. 몇 가지 대표적인 열전의 이야기를 소개할게요.
✅ 자객 열전
『사기』 열전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 중 하나입니다. 형가(荊軻)와 전광(專諸) 같은 자객들의 목숨을 건 의로운 암살 시도가 그려집니다. 형가는 진시황의 암살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고, 전광은 자신의 몸을 무기로 삼아 군주를 제거했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인간의 의지와 결단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 백이·숙제 열전
주나라 초기에 은나라 마지막 왕 주왕의 폭정을 피해 산속에서 고사리를 캐며 청빈하게 살았던 형제의 이야기입니다. 주나라에서는 곡식을 주며 투항할 것을 제의했는데, 이들은 끝까지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고, 죽음을 택했는데, 사마천은 이들의 충절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 굴원 열전
초나라의 시인 굴원의 일화도 눈길을 끕니다. 굴원은 정적에게 모함을 받아 유배되었지만, 자신의 정직한 신념을 지키다 결국 멱라수에 몸을 던졌습니다. 사마천은 굴원의 비극적 죽음을 통해 충성과 진실의 가치를 강조했습니다.
✅ 상앙 열전
진나라의 개혁가 상앙(商鞅)의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상앙은 법치를 강화해 진나라를 강국으로 만들었지만, 결국 개혁이 끝나자 반발로 처형되었습니다. 사마천은 개혁가의 비극적 말로를 통해 역사와 권력의 아이러니를 조명했습니다.
* 사마천의 역사관과 평가

사마천은 『사기』를 통해 인간의 삶과 권력의 흥망성쇠를 기록했습니다. 그는 “사람은 반드시 죽지만, 그 죽음의 무게는 태산과 같거나, 새털처럼 가볍다”라고 말하며, 삶의 가치와 명예를 강조했습니다.
이 말은 곧 역사 기록의 진정한 의미를 대변합니다.
그는 권력자뿐 아니라 민초들의 목소리를 기록하며, 인간 중심의 역사관을 제시했어요. 사마천의 역사관은 후대 사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으며, 그의 『사기』는 ‘역사서의 모범’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 사마천의 유산
사마천은 궁형의 치욕 속에서도 진실을 기록했고, 이를 통해 인간과 역사의 진정한 의미를 후세에 전했습니다. 『사기』는 단순한 역사서가 아니라, 인간의 삶과 가치, 그리고 시대의 교훈을 담은 위대한 작품입니다. 사마천의 생애와 집념, 그리고 『사기』에 담긴 숱한 이야기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빛나며, 역사의 거울이자 인간 정신의 찬란한 증거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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